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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pensees) by Blaise Pascal

 

 

팡세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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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는 미완성작 ......

 

       파스칼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로서 세월이 흐를수록 그 광채를 더해가고 있다.  파스칼이 죽은지 어느덧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팡세>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인간의 문제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되고 있다.  파스칼은 신학자가 아니며 체계적인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과학적인 천재인 동시에 위대한 모랄리스트요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팡세>는 그의 정신적인 위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팡세>는 완성된 저술이 아니라 저술을 위한 메모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생트 뵈브의 말대로 <팡세>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으나 시멘트를 그 사이사이에 넣지 않은 미완성 탑이다.  파스칼은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필요한 것은 모두 기억의 서랍속에 차곡차곡 챙겨 두었다.  만일 날로 더해가는 신병으로 그의 기억력이 흐려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이런 노트를 적어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파스칼의 생질인 에티엔느페리는 <팡세>의 포르 르와얄 판 서문 첫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파스칼은 수학·물리학 연구에서 커다란 진전을 보였지만, 젊어서 그것을 그만두고 30세 때부터 보다 더 중요하고 고귀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서와 기독교 도덕의 연구에 전념했다.
       ...... 만일 하나님이 그가 여생을 바쳐 대성하려던 종교상의 저술을 완성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주셨더라면, 그 저술은 그가 할 수 있었던 다른 어떤 업적보다도 훨씬 우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견해는 다른 학문에 대한 그의 견해를 크게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이 저술의 복안을 세운 것은 그가 죽기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는 질병과 싸우면서 4년동안에, <팡세>에 수록될 <단장>들을 메모했던 것이다.  그는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해 그것을 썼으므로, 피곤하지 않도록 간단히 메모했으며, 또 그것도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을 상기하는 데 필요한 것만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불완전한 것이나 너무 간단한 것이나 설명이 불충분한 것이나 상당히 엉성하고 설익은 말이나 표현이 있다고 해도 결코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렇지만 때로는 펜을 손에 잡으면, 건강했을 때보다는 못해도 자기의 상상을 조리있게 전개한 대목도 없지 않다.
       그러나 <팡세>는 역시 미완성 작품이다.  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기 개인을 위해 썼고, 그 후에 다시 한 번 읽어보지도 못하고 수정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초고를 남겼으니 말이다.  파스칼은, 이 초고를 하나의 저술로 완성하려면 건강한 몸으로 온갖 힘을 기울여도 10년은 걸려야 한다고 생전에 가끔 말했다고 한다.  만일 파스칼이 건강을 회복하여 마지막 추고까지 할 수 있었더라면 그의 저술이 얼마나 놀라운 역작이 되었을지 상상하기란 결코 어렵지는 않다.
       이제 그처럼 지적인 신앙인 파스칼의 정신적인 과정을 잠시 더듬어 보자.  파스칼이 포르 르와얄 수도원에서 자신의 대적으로 삼은 사람은 몽테뉴였다.  파스칼 뿐만 아니라 포르 르와얄 수도사들에게는 몽테뉴의 회의론(懷疑論)이야말로 신앙을 위해 가장 못마땅한 괴물이었다.  파스칼은 몽테뉴를 분쇄하기 위해 그를 연구했다.  그리하여 <팡세>에는 몽테뉴에게서 거의 그대로 따온 문장도 가끔 볼 수 있다.  몽테뉴의 위대한 점은 그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회의에 가치를 부여한 데 있다.  파스칼의 말대로 '생각하는 갈대'로서의 인간은 반드시 회의를 갖게 마련이다.  회의는 신앙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회의를 초월할 때 이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회의 자체는 신앙의 대적이다.  파스칼은 신앙으로 이 회의라는 이름의 악마와 끝까지 싸워 이겼다.  신앙이란 막연한 의지(依持)나 기대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와 체험에 의한 반석같은 신념이다.
       파스칼은 금욕주의자 중의 속인(俗人)이고, 속인 중의 금욕주의자였다.  그에게는 이 두가지가 융합되어 하나의 인격을 이루고 있다.  인류의 대부분은 정신이 나태하며, 탐구심이 없고 공허한 일에 곧잘 빠져 들어가며 그 감정은 극히 미온적이다.  그러므로 깊은 회의도 심오한 신앙심도 그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인간을 속박하는 굴레이다.  이에 대해 파스칼은 큰 환멸을 느끼고 신앙으로 극복한다.
       다음에 파스칼이 받은 장세니즘의 영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장세니즘은 네덜란드의 얀센이 창시한 교리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들어 은총·자유의지·예정론에 대한 엄격한 견해를 표방하여, 포르 르와얄 파 등이 신봉했으나 1713년 로마 교황에 의해 금지되었다.  파스칼은 장세니즘의 교리 못지 않게 포르 르와얄의 수도원 생활에 구현된 장세니즘의 성과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 같다.  안이한 기독교의 신앙을 배격한 경건하고 금욕적인 포르 르와얄 교단은 파스칼과 같은 정열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인간에게 큰 호감을 사게 되었다.  <팡세>에 나오는 인간의 온갖 관심사에 관한 명철한 분석은 이 교리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팡세>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매우 단편적이다.  그러나 조금만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이 책 전체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사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사상은 서로 떼어놓고 단편만 가지고 논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다음에 <팡세>의 원전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자 한다.  근래에 와서 인간 파스칼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팡세>의 원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을 보여, 파스칼의 자필초고의 해독이나 어구의 교정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파스칼을 연구한 사람들을 괴롭혀 온 <팡세>의 편찬방법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밝혀졌다.
       파스칼이 죽은 직후에 발견된 초고가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한권의 책으로 출판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처음으로 <팡세>를 출판한 포르 르와얄 판 간행 위원회에서 많은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국 위원회가 채택한 것은, 많은  초고 중에서 비교적 명료하고 완성된 것을 골라 같은 주제에 관한 것을 동일한 제목 아래 정리하고, 그 밖의 별로 명료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미비한 것은 모두 삭제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이 포르 르와얄 판은 1670년 파리에서 간행된 후 1761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거의 개정되지 않았다.  18세기 말옆에 와서 포르 르와얄 판의 분류를 무시한 새로운 <팡세>가 몇 가지 나왔으나 편찬 방법에는 다른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그 후 반 세기가 지나 지금까지 간행된 <팡세>와 파스칼의 자필 초고 사에에 어구상 차이가 있는 것을 지적하고, 원전 비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후로, 파스칼의 연구가들은 직접 초고 원문의 충실한 재현에 힘써, 1844년부터 1897년 사이에 다섯 종류의 <팡세>가 출판되었다.  또한 이 책 첫머리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04년에는 브랑슈비크가 19세기에 있었던 운전비평의 성과를 토대로 새로운 <팡세>를 내놓았는데, 그는 초고 원본과 사본에 있는 <팡세>의 단장을 모두 수록했다.  그는 출처가 분명한 단장을 내용에 따라 14개의 주제 아래 정리하여 편찬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 <팡세>에는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단장들이 서로 한군데로 몰려있기 때문에, 20세기 전반에 널리 유포되어 오늘날 <팡세>의 장구를 인용할 때의 번호는 일반적으로 브랑슈비크 판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1925년부터 1947년 사이에 각각 특색있는 몇가지 새로운 <팡세>가 출판되었는데, 주로 제 1일 사본의 분류에 따라 <팡세>의 신판을 편찬하고, 파스칼 자필의 초고에서 지워 버린 곳이나 다시 쓴 것, 또는 가필한 곳을 활자로 구별하고 있다.  그리하여 초고의 해독이 정확하고 교정이 엄정한 점에서 <팡세>의 원전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팡세>의 초고 원본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 포함되어 있는 초고의 대부분은 물론 파스칼 자신이 직접 쓴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필적이 약간 섞여 있고, 후에 파스칼 자신이 부분적으로 가필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제 1 사본도 1795년에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이 제 1 사본과 초고 원본을 비교해   보면 구성의 순서가 다르고 또 수록한 단장도 모두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제 1 사본 이외에 제 2 사본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제 1 사본이 작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초고에서 배낀 것으로 보인다.  구성순서는 제 1 사본과 다르지만, 단장의 수는 후에 다른 사람이 추가한 것을 제외하면 제 1 사본과 거의 같다.
       그리하여 근래에 와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팡세>를 편찬하기 위해 세가지 원전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  즉 초고 원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판독한 것을 토대로 하여 제 1 사본의 순서대로 단장을 배열하고, 제 1 사본에 빠진 초고 원본 중의 단장을 거기에 추가하고, 다시 제 2 사본에 따라 단장을 보충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끝으로 인간 파스칼의 단면을 알아보기 위해 에티엔느 페리의 <팡세> 서무느 일부를 여기 인용하고자 한다.

 

       ...... 인생을 통해 거의 간단없이 그를 괴롭혀 오던 병고와 쇠약 속에서 그와 같이 인내심을 나타내고, 그 자신에 대해 그와 같이 가열하고도 준엄한 금욕을 행하여, 자신의 감각에 알맞는 것을 모두 금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음식이건 약품이건 불쾌한 것을 고통으로 알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반가히 섭취하고, 옷이건 먹을 것이건 도구이건 그 밖의 어떤 것이건 간에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모조리 배척하고, 가난에 대해 매우 열렬한 사랑을 품고 가난이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 않도록 했다.  또 무엇을 계획하든지 빈곤을 실천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온정을 가지고,   여유가 전혀 없을 때에도 결코 시여를 거부하지 않고 가끔 상당한 액수의 시여도 하였다.

 

 

파스칼의 걸어온 길 ......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오베르뉴 주 클레르몽에서, 세무관리인 아버지 에티엔느 파스칼과 어머니 앙트와네트 베공 사에에서 태어남

1625년  (2 세)

누이동생 자크린느가 출생, 이 밖에도 파스칼에게는 누나 질베르트가 있었음.

1626년  (3 세)

어머니 사망.

1631년  (8 세)

아버지가 세무관리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이주.

1635년 (12세)

아카데미 학자들과 대화를 시작.

1639년 (16세)

<원추곡선시론(圓錐曲線試論)> 발표.

1645년 (22세)

3년간의 연구 끝에 계산기를 제작함.

1646년 (23세)

새로이 종교에 눈을 떠 이른바 '제 1의 회심'에 이름.

1647년 (24세)

데카르트의 방문을 받음.  논문 <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발표.

1648년 (25세)

<액체 평형에 관한 실험담> 발표.

1651년 (28세)

아버지 사망.

1652년 (29세)

누이 동생 자크린느가 포르 르와얄 수도원에 들어감.

1653년 (30세)

<유체 균형론>(1663년 출판), <기중론(氣重論)>(1665년에 출판) 두편의 논문 집필.

1654년 (31세)

<산수 삼각론>(1665년에 출판) 집필.  11월 23일 밤 10시 30분과 12시 30분에 성령의 감화를 받음.  이 경험을 기록한 <비망록>을 양피지에 써서 죽을 때까지 옷 속에 꿰매어 간직함.  이것을 파스칼의 '제 2의 회심'이라고 함.

1656년 (33세)

<프로방시알>의 <제서간(諸書簡)> 발표.

1657년 (34세)

<은총론>(1779년 출판) 및 <기하학의 원리> 집필.  <기독교의 변증론> 구상.

1658년 (35세)

<사이클로이드에 관한 회장(回章)> 발표.

1659년 (36세)

건강이 약화되어 휴양.

1660년 (37세)

<기독교의 변증론>, <병의 선용을 기원하는 기도> 및 귀족의 신분에 관한 3개의 논문 집필.

1662년 (39세)

8월 19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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